2021-37.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7:14-23
설교일시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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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나
막 7:14-23
(2021/09/12, 창조절 제2주)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를 두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여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 예수, 그 낯선 존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참 만만치 않은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인간과 사람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물이나 식물과 대비되는 개념인 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관계적 개념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p.31)입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난민들이 늘 불안 속에 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취약한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은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추수감사예배를 드릴 때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신26:5)라고 고백했습니다. ‘떠돌아다니다’는 단어와 ‘몸붙여 살다’라는 단어 속에는 그들의 신산스런 처지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스스로 주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약자들을 늘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공정함을 잃어버린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 이르셨습니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나 헬라어 ‘하기아조’는 속된 것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하나님께 바쳐질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거룩은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 누군가의 소유물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며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나누면서 차별을 정당화했습니다. 차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배제와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려 하지도 않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머문 것은 그런 가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 더럽다고 천대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진의 음화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 할 사람들을 주님은 역사의 무대 위에 자꾸 불러올리셨습니다. 쥐죽은 듯 살아야 하는 이들이 자기들도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 종교적 특권은 해체됩니다. 기득권자들이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낯선 존재였습니다. 낯선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위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질서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자꾸만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특히 정결법에 대한 논쟁이 심각했습니다.

• 낙인 찍기의 위험
스스로 경건하다 여기는 이들의 눈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모습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몸을 정결하게 했고,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었습니다. 혹시 부정한 자들과 접촉했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 씻기는 코로나 시대의 손 씻기처럼 위생적인 이유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조상 적부터 지켜온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불결하다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불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차별과 따돌림, 멸시와 천대를 당해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태도를 일러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것과 같다 이르셨습니다(마 23:24).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낙인 찍기처럼 폭력적인 게 또 있을까요? 낙인은 감옥과 같아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는 것처럼 큰 죄가 또 있을까요? 성경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람됨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말합니다. “허세부리지 않음, 그리고 자신의 불투명함, 단견(短見), 무력함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06). 다른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또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사람됨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삶이 사랑의 빚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조롱하고 혐오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허위의식을 보셨습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막 7:6b-8)

예언서에는 헛된 예배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호 4:7).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말 1:10). 충격적인 말입니다. 타락한 종교처럼 추한 게 또 있을까요? 외적인 예배 형식은 따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본本은 버리고 말末은 붙드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주님은 잎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려받은 전통은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당대의 현실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한국교회를 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참으로 두려운 질문입니다.

• 콩팥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낌과 존중이 기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의 비전을 실천하려고 애쓸 때 아름답습니다. 그런 삶이 곧 깨끗한 삶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자기중심성이라는 노예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부에 있는 이들은 마치 자기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지향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아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집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적으로 경건하게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씀이 또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 속사람의 건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소설의 화자가 한 노인과 동행이 되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팠던지 먹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영감님?”
“뭐든 다 잘 먹습니다. 이건 좋고 저건 싫다고 하는 건 죄를 짓는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골라서 먹는 게 나쁘다는 건가요?”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요?”
“굶주리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이 문답 끝에 화자는 말합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그런 품위와 연민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베스트트랜스 옮김, 더클래식, p.221-2) 사람됨이란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품위조차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이들을 어찌 경건하다 하겠습니까?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지 않고, 접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꽤 괜찮은 신자인 것처럼 자부하지만, 하나님께는 그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15-16).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배어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참 이상합니다. 형체가 없으니 말입니다. 다양한 형용사와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의 풍경이 드러납니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굳은 마음, 깨끗한 마음, 더러운 마음 등이 그것입니다. 헬라어 카르디아(kardia)나 히브리어 킬야(kilyah)는 모두 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정신, 감정, 의지보다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채,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음이 부패하거나 망가지면 삶 전체가 어그러집니다. 앞서도 본 것처럼 주님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에 대해 우울한 진단을 내놓았습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마음이라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콩팥’입니다. 구약에서 콩팥은 양심의 소재지로 여겨질 때가 많았습니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던 욥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과녁 삼아 쏘신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든다면서 “그가 사정없이 내 허리를 뚫으시고, 내 내장을 땅에 쏟아 내신다”(욥16:13)고 탄식했습니다. 여기서 ‘허리’는 콩팥을 번역한 말입니다. 예레미야도 악인들을 가리켜 그들은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렘 12:2)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속’이라고 옮긴 단어가 바로 콩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내적인 결단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더러움을 씻는 샘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어느 분은 ‘더럽다’는 말을 ‘덜 없다’고 설명합니다. 말놀이이긴 하지만 새겨들을 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더러움은 많이 모아 두고, 가득 채우는 것과 연관됩니다. 자꾸 덜어내고 말끔히 비우면 깨끗해집니다. 인간은 어떤 때 더럽습니까? 자기로 가득 차 있을 때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자기로 가득 찬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지도 존중하지도 못합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현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맨 먼저 요구하신 것은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이익에 담백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맑게 닦아낸 사람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풍덩 뛰어 들어 말갛게 씻은 사람입니다. 맑은 하늘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듯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만나면 우리 마음도 덩달아 맑아집니다. 우리가 날마다 몸과 마음을 닦지 않으면 소리 없이 쌓이는 먼지가 더께를 이루듯, 우리 마음도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귀가 어두워져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외적인 종교행위를 하는 것은 쉽습니다. 주일이면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도 바치고, 가끔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시편 시인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시 51:17)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욜 2:13)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어줄 샘(슥 13:1)이신 주님 앞에 자꾸 나아가,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마음과 연결될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 마음이 가을 하늘처럼 맑아져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9월 12일 11시 28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