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6.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07:31-43
설교일시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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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시 107:31-43
(2021/09/05, 창조절 제1주)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그분을 기려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강들을 사막으로 만드시며, 물이 솟는 샘들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옥토를 소금밭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막을 연못으로 만드시며, 마른 땅을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드시고, 굶주린 사람들로 거기에 살게 하시어, 그들이 거기에다 사람 사는 성읍을 세우게 하시고, 밭에 씨를 뿌리며 포도원을 일구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가축이 줄어들지 않게 하신다. 그들이 억압과 고난과 걱정 근심 때문에 수가 줄어들고 비천해질 때에, 주님께서는 높은 자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황무지에서 헤매게 하셨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 고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그 가족을 양 떼처럼 번성하게 하셨다. 정직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사악한 사람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이 일들을 명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라.]

• 창조절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창조절 첫째 주일입니다. 창조절기는 비교적 최근에 제정된 절기입니다. 생태계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로부터 나왔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창조 질서를 보전하는 책임을 지고 살자는 취지입니다. 올해 창조절의 주제는 ‘창조세계 모두를 위한 집: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19)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온갖 생명을 산출했던 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창3:17). 우리는 이 말을 신화적 표상이나 문학적 표현이 아닌 현실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형 산불, 홍수, 가뭄, 녹아내리는 빙하, 생물종들의 멸종, 대기와 바다의 오염, 황폐해진 땅, 그리고 코로나를 비롯한 감염병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우리 교우 구상모 PD가 책임 연출하여 만든 KBS 다큐 인사이트의 ‘붉은 지구’는 묵시록적 풍경이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 현실을 섬뜩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 일어난 일을 보는 듯 했습니다.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계6:8).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조금 암담합니다. 너무 늦은 게 아닐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야말로 창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 세상이 이제는 낯설고 두려운 곳으로 변했습니다. 올해 창조절 공동 기도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로 지어졌고, 다양한 생명들이 어울려 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소명임도 밝힙니다. 하지만 공동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을 지니고 싶어 지구가 자신의 한계를 넘을 때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자생력과 조화를 이루지도 않고, 순환에 맞추어 소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서식지는 척박해지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생물종들이 사라지고 생태계는 무너졌습니다. 한때 생명과 유대관계로 가득했던 암초와 동굴, 높은 산과 깊은 바다는 건조한 사막이 되어 마치 창조 이전의 모습처럼 비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함과 분쟁으로 인해 평화를 찾아 이주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화재, 벌목, 기근을 피해 새끼를 낳고 살아갈 거주지를 찾아 낯선 땅을 헤매고 있습니다.“

•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노래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이제 시편 시인의 노래를 통해 그 지혜를 배워보려 합니다. 시편 107편은 시편의 제5권을 여는 시입니다.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이 다섯 권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아시지요? 학자들은 오경의 구조를 따라 나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편 107편부터 150편에 이르는 시편 제5권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외치는 감사와 찬양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감사하다’(야다), ‘찬양하다’(할랄)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파국과 재난을 경험했지만, 그래서 절망의 어둠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곤경을 모른 척 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주님께 감사드리자는 초대의 말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절들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가 구원을 체험한 사람의 고백,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사람의 기쁨, 질병의 고통에서 회복된 사람의 감사,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이가 경험한 구원의 기억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경험한 바를 나란히 모아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거나 듣는 이들은 여기에 열거된 고통이 형태는 달라도 자기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살다보면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요.

그런데 눈여겨보면 시의 중간 중간에 감사와 찬양의 후렴구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그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6, 13, 19, 28).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8, 15, 21, 31).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처한 이가 부르짖는 소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주십니다. 출애굽기는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거듭 거듭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것은 현실의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갈라 그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부활의 문을 여셨습니다. 인간의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 여호와의 위대하심
오늘 읽은 대목은 회중들을 감사와 찬양으로 초대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사역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질서의 전복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부른 미리암의 노래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층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래는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출15:21) 하나님은 고대 근동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바로의 말과 기병을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강들을 사막으로 만드시며, 물이 솟는 샘들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옥토를 소금밭이 되게 하신다.“(시107:33-34)

장구한 지질학적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가 솟아올라 산이 되기도 하고, 섬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비옥한 땅이 황무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일을 지질학적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과학적 사실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정반대의 상황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막을 연못으로 만드시며, 마른 땅을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드시고, 굶주린 사람들로 거기에 살게 하시어, 그들이 거기에다 사람 사는 성읍을 세우게 하시고, 밭에 씨를 뿌리며 포도원을 일구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가축이 줄어들지 않게 하신다.“(시107:35-38)

하나님은 억압과 고난과 걱정 근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홀로 만족하려는 높은 자들에게 능욕 부으시고, 길 없는 황무지에서 헤매게 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가련한 신세의 사람들을 고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그들을 양 떼처럼 번성하게 하십니다. 이런 뒤집힘 혹은 전복적 상상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즉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태어나실 아기 예수를 마음에 그리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눅1:51-53)

현실은 암담해도 믿음의 사람들은 이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삽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머리에 그리며 사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시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절망의 현실 속에 희망을 심는 사람들
현실이 어둡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용기를 내야 합니다. 아직도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에서 자꾸 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워집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욕망에 저항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그 꿈에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이르렀음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고, 탄소 발자국을 덜 남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문제의 크기에 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미미할 뿐이라는 비관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 지구가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새로운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예인 로빈 월 키머러는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카누를 타고 야영장에 갔을 때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캠핑을 마칠 시간이 되면 엄마는 늘 주변을 샅샅이 치우라고 했습니다. 타고 남은 성냥개비나 종잇조각 하나도 엄마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올 때보다 갈 때 더 좋은 곳이 되게 하렴.” 지침이 명확합니다. 이게 상식입니다. 그래서 로빈 월 키머러는 말합니다.

“(우리는) 다음 사람이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땔나무를 남겨두어야 했으며 부싯깃과 불쏘시개가 비에 젖지 않도록 자작나무 껍질로 조심스럽게 덮어야 했다. 우리 뒤에 카누를 타러 온 사람들이 어두워진 뒤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데울 연료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았다.”(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p.61)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엊그제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사티시 쿠마르(Satish Kumar, 인도 출신의 평화 운동가)의 이야기가 제게 인상 깊게 들려왔습니다. “당신은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지구를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지구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야만 합니다.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지구를 구할 수 있겠어요. 지구가 훨씬 더 크고, 강력하고, 위엄 있고, 훨씬 더 에너지가 넘치는데요. 지구는 70억 인구와 1500만에 달하는 생물종들, 숲, 강, 산, 바다 등과 함께 존재의 예술을 구현합니다. 저는 이 세상을 오직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을 파괴하지 않아요. 오염시키지도 그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습니다. 존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을 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2021/09/02 자 한겨레신문 8-9면, 안희경의 내일의 세계, ‘아메리칸 원주민들처럼, 7세대 뒤를 생각하라’ 중에서)

우리가 지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걸작품인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하나님의 결정에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참 지혜입니다. 창조절기를 무심히 보내지 말고 생명과 평화의 청지기가 되라는 소명을 엄숙히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려 하십니다. 비관론을 내려놓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9월 05일 10시 16분 0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