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6.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 7:1-10
설교일시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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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
전 7:1-10
(2021/04/19, 부활 후 제3주)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이 또한 헛되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

∙초상집 vs. 잔칫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맘때가 되면 더욱 아픈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겨운 것이지만 예기치 않은 시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유족들의 피울음은 잦아들 줄 모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받는 세상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 꿈 이야기를 계속하고, 조롱당하면서도 그런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이야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삶은 복잡하고 모호합니다. 삶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삶의 상황 또한 저마다 다릅니다. 그렇다 해도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지향조차 없이 떠도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그 길 위에서 벗어날 때도 있고, 실족할 때도 있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기어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과 ‘평화’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언제나 주목해야 할 이정표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교 잠언 형식으로 삶의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7:1). ‘명예‘와 ‘향유’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말놀이입니다. 명예는 쉐임shem이고, 값비싼 향유는 쉐멘shemen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소유를 늘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태어남은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의식하며 삽니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야 하기에 우리는 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 후에 맞이하는 죽음은 허망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7:2) 이것은 앞 구절의 부연설명입니다. 4절 역시 그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은 ‘애곡하는 집‘이고 잔칫집은 ‘먹고 마시는 집‘입니다. 애곡하는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유한함과 슬픔이라는 거울 앞에 설 때 사람은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지 않던가요? 고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의 장례식 풍습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을 장례식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슬픔을 표출하는 장소였습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니’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장례가 나면 여인들은 망자를 기억하며 비명을 지르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만가를 통해 죽은 이의 삶을 떠올리고, 심지어는 그가 사용하던 도구까지 일일이 언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며칠 동안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넵니다. 그 공동체적 애도의 시간을 통해 가족들이 죽은 이와의 작별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입니다.(패트릭 리 퍼머, <그리스의 끝 마니>, 강경이 옮김, 봄날의 책, p.106-117)

∙슬픔의 연대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7:3) 우리 문화는 슬픔은 멀리하고 웃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지혜자는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웃음이 삶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라면 슬픔은 우리 삶의 지층을 살피도록 하는 감정입니다. 물론 웃음도 전염력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슬픔은 낯선 사람들조차 하나로 묶어 줍니다.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으로 널리 알려진 마크 트웨인이 남긴 자서전 메모 중에는 ‘어머니의 몇 마디’라는 단락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집에는 동부에서 팔려온 샌디라는 이름의 흑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온종일 큰 소리로 노래하고 소릴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하는 통에 마크 트웨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엄마에게 호소했습니다. “엄마, 쟤가 너무 시끄러워요.“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한 채 대답했습니다. “샌디는 엄마랑 헤어지고 친구들과 떨어져 이리로 팔려온 아이다. 저렇게라도 노래하지 않으면 엄마 생각, 동무 생각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니? 나는 샌디가 노래할 땐 오히려 안심이 된다. 걔가 시무룩해하면 나는 그때가 더 걱정이다.“ 마크 트웨인은 그 날 이후 샌디의 노래가 더 이상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말씀이 가슴에 박혀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도정일, <만인의 인문학>, 사무사책방, p.135-6) 누군가의 슬픔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의 지평 또한 넓어집니다.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번역은 이 대목을 “얼굴에는 시름이 생겨도 마음은 바로잡힌다”고 번역해놓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고후7:10a)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여 늘 근심의 빛을 띠고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된 이들의 표정은 진중하면서도 깨끗하고 맑아야 합니다.

∙어리석음, 그 치명적 전락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이 또한 헛되다.“(7:5-6) 세상에 책망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제 경험상 책망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발전 가능성이 큽니다. 신뢰 그룹을 형성할 때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지적을 당한 사람이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불쾌해 하며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적질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신뢰가 쌓인 후에 바로잡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게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일 겁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머리말 끝에서 ‘많은 질정을 바랍니다’라는 구절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질정叱正이란 ‘꾸짖어 바로잡아줌‘이라는 뜻입니다. 짐짓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는 겸허하게 자기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책망이 유익한 것은 이런 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아를 부풀게 만드는 헛된 말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찬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괜한 찬사를 들을 때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손사래를 칠 것까지는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일러야 합니다. ‘너, 알지? 네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그래야 거짓 자아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탐욕’이라 번역된 ‘오쉐크’는 과도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누군가를 협박하여 빼앗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힘 없는 사람을 위협하고 갈취하는 행위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사물에 어둡고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광기에 가깝습니다. 일종의 항진 상태, 과잉상태입니다. 자기를 억제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기에 폭력적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에 포박된 사람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뇌물은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만듭니다. 이건 노자 역시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는 사냥을 하느라 뛰어다니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덕행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도덕경’ 12장).

동물을 잡는 것만 사냥이겠습니까? 돈을 따라 몰려다니는 것 역시 사냥일 겁니다. 투기꾼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결국 그런 삶은 우리를 미치게 만듭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 잊어버리고,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이익이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이 될 때 세상은 더욱 사나워질 겁니다. 이웃들의 아픔에 눈을 감고, 기후 위기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돌이킬 줄 모릅니다.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어리석은 마음이고 병든 마음입니다. 마음에 병이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공감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줄어들 때 우리는 병든 존재가 됩니다. 병든 마음은 하나님을 모실 생각도, 능력도 없는 마음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여백조차 없는 마음입니다. 영혼의 전락이고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물러섬입니다.

∙급한 마음을 다독이라
8절입니다.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의욕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람은 행복해 합니다.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어야 할 때 사람들은 다 우울해 합니다. 잘 끝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음이고, 시작해야 할 때 망설이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그 때를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끝내야 할 때는 미련이 남더라도 과감하게 끝을 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눅14:28).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지혜자는 자만한 마음보다는 참는 마음이 낫다고 말합니다. 자만한 마음은 조급한 마음입니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입니다. 참는 마음은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향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두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드거니’와 ‘지며리’입니다. ‘이드거니’는 ‘한동안 뜨음하여 분량이 좀 많게‘라는 뜻이고, ‘지며리’는 ‘차분하고 꾸준히’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는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내리는 일종의 처방전입니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9) 조그마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이들을 많아졌습니다. 선불 맞은 노루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문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조건만 충족되면 언제든 살아나는 불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동물들을 향해, 심지어는 무생물을 향해서도 분노를 드러내며 삽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이러합니다. 앞차의 출발이 조금만 늦어도 경적을 울려대며 화를 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기와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악플을 달고 비방하고 저주를 퍼붓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분노도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분노를 통해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는 대개 위험합니다.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일수록 분노에 휩쓸려 자기 분수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현실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뒤를 돌아보며 살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옛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빌려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과제와 맞서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을 둘 때 그곳에서 뜻밖에도 예수님과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어지러울 때면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우리가 선 자리를 톺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머무는 곳임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이 우리의 길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4월 18일 11시 56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