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3.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9:1-11
설교일시 2018/08/19
오디오파일 s20180819.mp3 [723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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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대답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고 해도, 그분의 천 마디 말씀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 그를 거역하고 온전할 사람이 있겠느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을 옮기시며, 진노하셔서 산을 뒤집어엎기도 하신다. 지진을 일으키시어 땅을 그 밑뿌리에서 흔드시고, 땅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을 흔드신다. 해에게 명령하시어 뜨지 못하게도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어 빛을 내지 못하게도 하신다.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고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괴물의 등을 짓밟으신다. 북두칠성과 삼성을 만드시고,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시며,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내 앞에서 걸으신다 해도 알 수 없다.]

∙Sacramentum Mundi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말복이 지나면서 정말 갑작스럽게 바람이 달라졌습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대기는 깨끗합니다. 지난 8월 초에 환경부원들과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둘째 날 은총의 숲을 둘러보고 후스타이 국립공원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대개 그곳에 장기간 머물며 사파리 투어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그저 숙소 가까운 곳을 산책했습니다. 해거름에 광대한 초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설핏 지면서 만들어내는 노을이 아름다웠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별들도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그 고요하면서도 장대한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감격을 “나 자신 속에 잠자고 있던 우주적인 정신이 내 앞에 지금 나타난 그 대상으로 인하여 깨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산을 보고 기뻐할 때는 나 자신 속에 높음을 본 것이요, 바다를 보고 시원해 할 때는 나 자신이 넓어진 것이며, 성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는 나 자신이 거룩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쁘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 버성기는 동안 우리는 높음과 깊음, 넓음과 맑음의 세계를 잊거나 잃어버리고 삽니다.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잊고 살았던 삶의 또 다른 차원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15:5)

시선을 바꾸면 세상이나 사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수님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의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의 봄은 꿰뚫어 봄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전통은 이런 것을 일러 ‘성사 聖事’ 곧 ‘Sacramentum Mundi’라 합니다. 세상의 성례전이라는 뜻입니다. 속된 것 속에서 거룩한 것을 보고, 가시적인 것에서 불가시적인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화성, 수성, 목성, 금성이 줄지어 늘어서고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다녀온 후에 한 분이 카톡 대화방에 별들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었습니다.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는 여름철에 가장 밝고 두텁게 보인답니다. 다른 계절에는 보기 힘들다 하네요. 그나마 여름철에도 주변에 빛 공해가 없어야 하고, 구름 없는 맑은 날에 달이 뜨지 않아야 하며, 그나마도 미세먼지나 습도가 일정 수치를 넘어가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아서 우리는 은하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이 우주에 대해 무지한지를 통탄하면서 세상에는 공부할 게 너무 많다며 글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한가하게 직장 생활할 때가 아닌 거 같습니다, 목사님.” 농담처럼 한 말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현실 논리에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이의 회한이 담겨 있었습니다.

∙ 낯선 세계와의 만남
사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우리는 자꾸 고개를 들어 다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에 매몰당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 가운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의사들은 그 병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대개 자기들을 가두고 있는 철책만 바라보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철책 너머에 있는 들꽃에도 눈길을 주고, 무심코 흘러가는 구름에도 눈길을 주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가두고 있는 그 철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그것이 마음의 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병을 ‘철책선 병’(barbed wire disease)이라 명명했습니다. 담장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이 필요합니다.

더 큰 세상 혹은 낯선 세상에 나를 던져보아야 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고난, 질병, 유한함,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 자기를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 고난은 우리가 의지하고 살았던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질병은 우리가 한낱 육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합니다. 죽음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가 애집하고 있던 것들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둘 사이의 간극 때문에 그는 어두운 데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은총이 아니고는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구원의 서광은 그렇게 비쳐들었습니다. 파커 J. 파머는 깨어져서 조각나는 것이 아니라 깨어져서 열리는 것이 온전함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파커 파머는 하시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질문했습니다.

“토라는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말하나요? 왜 이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나요?“ 랍비가 답한다. “우리가 현재 그러한 것처럼,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 꼭대기에 둔다. 그리고 말씀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날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2018년 7월 27일, p.217)

마음이 부서져야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은 씁쓸하지만 진실입니다. 대개 자기 한계에 직면했던 사람일수록 말씀과 깊이 만납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절망의 미로를 헤쳐나옵니다.

∙ 자아가 무너질 때
욥은 어땠을까요? 하루 아침에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린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시련을 맛보지 않았겠다고 탄식합니다. 불행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친구들은 욥의 태도를 무척 당혹스럽게 여깁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았고, 그것이 친구들의 신앙적 감수성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 지은 자를 벌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는 사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합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정성껏 쳐놓은 거미줄이 속절없이 끊어지듯, 행복을 기약하며 지은 집이 허물어지듯,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나무 뿌리가 한 순간에 뽑히듯 악인은 그렇게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빌닷의 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순순히 시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9: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이걸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 해도 승산이 없습니다. 그분의 천 마디 말씀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는 세상을 질서 있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는 지구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누가 주님의 영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주님의 조언자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그가 누구와 의논하시는가? 누가 그를 깨우쳐 드리며, 공평의 도리를 가르쳐 드리는가? 누가 그에게 지식을 가르쳐 드리며, 슬기로운 처세술을 가르쳐 드리는가?”(사40:13-14)

연이어 등장하는 수사의문문은 ‘그럴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뭇 나라는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사40:15)입니다. 욥은 바로 이런 인식에 당도했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이 장엄한 세상에서 그는 자기가 먼지보다 작은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심판하실 그분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다”(9:15). 하지만 비애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하게 자기 심정을 드러냅니다.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9:21).

∙ 새로운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다 해도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이 쉽게 아물지는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티끌이라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이 스러지지는 않습니다. 뜻하지 않은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세월호 희생자 이창현 군의 어머니 최선화 집사님이 작년 세월호 3주기에 바친 기도를 들어보셨는지요?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 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 그 어머니의 하늘은 빛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유족들 곁에 다가와준 마음 따뜻한 이웃들을 통해 그분들의 가슴에 하늘빛이 스며들었고, 뒤늦게나마 그 빛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은 이다지도 눈물겹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이유가 분명한 고통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고통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고통은 견디기 어렵지만 그 고통을 더 큰 세계의 입구로 삼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종이라 칭송받았던 요한 23세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피정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총에 잘 응하지 못했음이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떠한 일이 자기에게 닥치든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기 위한 기회로 삼겠다고 다짐합니다.

“‘자, 그러면 정화(淨化)의 궁핍이여, 오라! 오뇌와 비참과 고통이여, 오라! 나는 그것들을 예수님에 대한 내 충만한 사랑의 증거로써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성스러운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면 즐거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정신의 성화에 바쳐지는 것이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긴들 그것이 뭐가 대수롭겠는가? 내 비천함과 더 보잘 것 없음을 결코 잊지 않고 사는 것에 마음을 쓰며, 혹 누가 나를 해하면 기꺼이 ‘당신의 규정을 깨우치고자, 나에게 고생을 주신 것은 좋은 일이었나이다‘(시편119:71)라고 언제나 답하리라.”(교황 요한 23세, <靈魂의 日記>, 박 바오로 옮김, 크리스챤출판사, 1996년 4월 5일, p.195)

모든 고통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주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없었기에 그 고통은 복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시선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되 정신이 피폐해지기 않기 위해서는 더 큰 세계와 자주 접속해야 합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듯 주님의 은총의 바람이 우리의 울울한 마음에 불어와 이웃과 더불어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8월 28일 09시 37분 4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