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 2020년 05월 08일
작성자 김기석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oil on canvas, 137 *101cm, 루블 박물관)

“오오 눈부시다/자연의 빛/해는 빛나고/들은 웃는다”. 괴테의 ‘오월의 노래’ 첫 부분입니다. 괴테가 살았던 독일의 기후도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5월은 사람들에게 설렘을 안겨줍니다. 윤석중 선생님이 가사를 쓰신 ‘어린이날 노래’ 역시 싱그러운 자연을 노래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런데 가정의 달인 오월의 첫날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향상하기 위해 제정된 ‘세계 노동자의 날’입니다.

노동은 신성합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스림은 물론 함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돌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에덴동산에서 일하라고 부름 받은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일은 지긋지긋한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신 속에 있는 생명력과 창의력이 외적으로 발현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자연의 품 안에서 노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이 그 바탕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조적인 노동은 우리 속에 깊은 결속 감정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목수라고 번역된 단어 '테크톤tekton‘은 나무나 돌을 다루는 장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건축 노동자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솜씨 좋은 테크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고향에 가서 회당에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 '그 손'이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예수의 손을 떠올려봅니다. 마디조차 보이지 않는 곱디고운 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굳은 살이 박힌 손, 마디 굵은 손, 더러 흉터도 보이는 손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노동자가 지혜의 말을 한다는 것이 낯설었을 테니까요.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교회(Sagrada Familia)‘는 놀랍게도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성 가족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에서 요셉은 드러나지 않거나, 주변적인 인물로 취급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 가족교회를 설계하고 시공한 가우디(Gaudi)는 요셉을 성가족의 중심인물로 내세웠습니다. 성 가족 교회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에는 요셉이 일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의 머리 위로는 분주히 날아다니는 일벌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이름도 빛도 없이 가정을 돌보는 가장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를 아는 이들은 금방 ‘촛불’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의 그림에 촛불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로렌 주의 빅쉬르세유에서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결혼 후에 뤼네빌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일찍부터 그림에 두각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종교개혁 이후에 신-구교간에 벌어졌던 30년 전쟁(1618-1648년) 시기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역병까지 창궐했습니다. 그는 황폐해진 고향을 벗어나 파리로 이주하여 루이 13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루이 13세는 조르주의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빛과 어둠의 조화 혹은 대비를 통해 대상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대가였습니다. 그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한 세대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였던 것 같습니다. 조르주는 프랑스 매너리즘 전통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소재, 기법 등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주사위 놀이꾼’, ‘점쟁이’, ‘카드 사기꾼’, ‘허디거디 연주자’ 등의 풍속적인 작품도 많이 그렸지만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그린 성서 인물화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아내에게 비웃음 당하는 욥’입니다. 그림 속의 욥은 심신이 다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천으로 하체만을 가린 그의 모습은 그가 ‘벌거벗기운 존재‘ 즉 인생을 쓰라림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여줍니다. 쭈글쭈글한 가슴과 배, 그리고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느다란 팔은 그의 곤경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촛불을 손에 든 아내는 마치 거인처럼 그의 위에 서서 그를 비웃습니다. 욥은 고개를 들어 그런 아내를 바라보지만, 퀭한 그의 눈은 초점이 없습니다. 화가는 어쩌면 욥의 모습 속에서 그 참담한 시대를 앓아야 했던 동시대인들의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르주 라 투르의 종교화들은 형태의 단순함은 물론이고 등장인물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인물들의 동작도 절제되어 있어서 감상자들은 화면에 옮겨진 사건보다는 각 인물의 고뇌 혹은 정신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촛불은 빛과 어둠을 다루기 위한 그 나름의 장치이겠습니다만, 인물의 고뇌를 심화하는데도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아궁이불은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을 하게 하지만 촛불은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몸을 움직여 장작을 옮겨와야 하고, 가끔은 부지깽이로 장작들을 재배열해야 합니다. 그러나 촛불은 한번 밝혀 놓으면 그만입니다. 일렁일 때도 있지만 금방 수직의 중심을 잡고 일어섭니다. 촛불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입니다. 그렇기에 촛불 앞에 앉은 사람은 자기의 내면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목수 성 요셉’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늙은 목수 요셉과 어린 예수입니다. 작업장에서 요셉은 주문받은 물건을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는 공구들과 대팻밥이 놓여 있습니다. 이미 진행되어온 작업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어지럽지는 않습니다. 마치 요셉의 성품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마 주름이 깊게 패인 요셉의 얼굴은 평온해 보입니다. 지친 기색은 없습니다. 자기 일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노동은 거룩해 보입니다. 죽지 못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눈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촛불을 든 채 작업장을 비춰주는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봅니다.

예수의 모습은 맑고 깨끗합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촛불이 꺼질세라 한 손으로 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은 마치 빛을 투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촛불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있으면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지만, 제게는 마치 예수의 얼굴에 드러난 하늘빛이 촛불을 거쳐 억센 요셉의 팔과 이마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광원은 촛불이 아니라 예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을 이어주고 있는 빛은 부자지간에 형성된 굳건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조르주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은 짙은 어둠 속으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말을 주고받고 있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깊은 결속 감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요함 속에 깃든 신성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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