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2020년 05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60:-12)

아침 해처럼 떠오르는 주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빕니다. 또 한 주간이 지나갑니다. 연초록의 계절입니다. 연초록부터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마치 생명의 현시인 듯 번져가는 나뭇잎들이 장관입니다. 인간의 현실은 사뭇 암담하지만 자연은 이렇게 무심히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향유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은 멈춰 서서 그런 자연 세계에 눈길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허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편지를 쓰고 있는 5월 1일은 우리교회 설립 기념일입니다. 함께 축하하고 새로운 다짐도 해야 하는 날이지만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12년을 살아온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해봅니다. 생장하기 좋은 조건도 있었지만, 물기 없는 메마름을 견뎌야 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뿌리는 물기를 찾아 더 깊은 곳에 촉수를 뻗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고투가 결국은 연초록 잎 하나를 틔우는 힘이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112년의 역사를 허투루 대할 수 없습니다. 스쳐가는 바람, 나뭇잎에 내려앉는 햇빛과 달빛 그리고 별빛, 잠시 머물다 가는 새 한 마리도 이 나무를 키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요즘 일곱 살 손녀가 가장 즐기는 놀이는 직소 퍼즐입니다. 모양도 비슷하고 색깔도 비슷한 작은 퍼즐들을 맞춰 온전한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이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될 법도 하건만, 지치지도 않고 놀이를 지속합니다. 어떤 성취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퍼즐 하나가 사라지면 전체는 온전한 그림이 되지 못합니다. 그림의 주제를 드러내는 형태가 아니라 단순한 배경에 속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온 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느 한 사람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존재감을 드러냈던 사람이나, 그저 그림자처럼 지내다가 조용히 사라진 이들은 모두 ‘우리’라는 그림을 만들어온 벗들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더 큰 그림을 만들어갑니다.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이 덧대지면서 부조화 속에 빠질 수도 있지만,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기에 다만 주님의 은총에 몸을 맡길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지금은 분명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였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지칠 때면 마음의 안식처를 찾듯 그 지역에 있는 예배당에 들르곤 했습니다. 꼭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고요함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곳은 참 많았습니다. 규모가 장대하고 내부 장식이 화려하여 관광객들의 시선을 끄는 곳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에는 더 적절합니다. 몇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로마 근교에 있는 ‘트레 폰타네 Tre Fontane’(사도 바울 참수터)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이른 아침이어서 아직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던 시간에 조용히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한 가지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노수녀 한 분이 하얀 행주를 들고 이미 깨끗한 장의자의 먼지를 닦고 또 닦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었지만 제게는 가장 거룩한 몸짓처럼 보였습니다. 장의자를 닦는 일을 그분은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수행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카푸친 수도회에 가기 위해 좁다란 계단을 따라 걷다가 아주 작은 동네 예배당이 있길래 가만히 문을 열어보다가 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습니다. 수도자 한 분이 제단 앞에서 장궤 자세로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텅 빈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모세가 서 있던 호렙산 떨기나무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꽤 많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오롯이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고요함과 절제된 몸짓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요?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 앞에 오롯이 바로 서려는 이들의 숨겨진 태도가 기초인 것 같습니다. 그런 기초가 흔들리면 그 위에 세우는 것들은 다 부실하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그보다 더 나은 은유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고,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 급하게 서둘 것은 없지만 지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신학자인 칼 라너가 교회를 위해 드리는 기도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을 자꾸만 되뇌게 됩니다. 

“당신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어 주신 은혜의 능력으로 교회는 항상 그런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련한 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도 내 신앙의 기초가 되고, 내 신앙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것이,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거두실 압도적인 승리를 믿는 것이 교회로 인해 쉬어질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찬란한 빛과 같은 존재라니요? 절대로 나는 아닙니다. 나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를 드러낼 뿐입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20년, p.181-2)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지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15:4) 하신 말씀만 꼭 붙들면 됩니다. 112년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 참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가 기대됩니다.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인생의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든,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시간이 다가옵니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내면의 빛이 흐려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 빛으로 주위를 환히 밝히십시오. 주님의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5월 2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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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호(20 05-02 02:05)
저희도 112년 역사에 한 지체들이 였음을 감사하고있습니다.
청파공동체의 앞날에도 여전히 주님의임재가 계속되기를 코비드19 시대에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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