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2021년 01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누가 "나는 마음이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비록 아이라 하여도 자기 행위로 사람됨을 드러낸다. 그가 하는 행실을 보면, 그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올바른지 그른지, 알 수 있다.(잠 20:9-11)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제법 차갑습니다. 소한 절기를 맞이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에 길들여진 비루한 몸 탓인지 바람 앞에 우뚝 설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세월에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물론 그러한 나태함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기를 빕니다.

 

러시아 시골 마을인 야쿠티아의 오미야콘 초등학생들은 영하 50도에도 등교를 한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추운 마을이라는 그 마을 아이들의 빨간 볼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적응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얼음의 세계에서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도, 물 위에서도 삶을 일구니 말입니다. 혹독한 추위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시절을 거쳐온 이들 모두가 겪은 일입니다. 웃풍이 심한 방에서 겨울을 나기란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맡에 뭉쳐 두었던 걸레가 새벽이면 꽝꽝 얼었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도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습니다. 방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에 창문을 빠끔히 열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이 어찌나 차가웠던지요. 아침이 되어 수돗가로 나가면 고무 다라이에 밤새 똑똑 떨어진 물이 꽁꽁 얼어 있기 일쑤였고 바가지로 그 얼음을 깨뜨린 후 그 아래 고여 있던 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얼굴이 마치 칼로 베는 것처럼 시렸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빙판길로 변해버린 가파른 마을길은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늦은 저녁에 온 물차에서 물을 받은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비틀비틀 언덕을 오르다가 쏟아놓은 물이 빙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내놓은 연탄재를 깨뜨려 길을 만들곤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면서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던 안도현 시인의 시가 그대로 피부로 와 닿는 것은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몇 해 전 남극의 황제 펭귄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펭귄들의 모습이 생명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알을 낳고 그 알이 얼지 않게 하려고 발 위에 올려놓고 아랫배로 눌러 그것을 보호하는 펭귄의 모성애 혹은 부성애를 보며 생명 경외를 가르쳤던 알버트 슈바이쳐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펭귄 허들링이었습니다. 남극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펭귄들은 서로 몸을 기댄 채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바람과 맞섰습니다. 원의 중심부에는 상당한 온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맨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내야 했고 체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씩 움직이며 안쪽에 있던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이동하고, 바깥쪽에 있던 펭귄들은 안쪽으로 이동하는 허들링을 한다고 합니다. 따뜻한 안쪽을 독차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세상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바로 이런 원리가 작동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의 뜨거운 이슈는 양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숨진 정인이 이야기입니다. 너무 끔찍하여 보도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실이지만, 그 대상이 여리고 여린 아이라는 사실에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게다가 그 양부모란 사람들이 둘 다 목사의 자녀이고 유명한 기독교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습니다. 이 세상에 와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학대받다가 죽어간 아이를 하나님께서 선하신 능력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중에도 실천적 무신론자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시편 시인의 고백과 기도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시10:14). ‘그런데 왜?’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정인이가 그렇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할 때 하나님은 왜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셨는지요? 우리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런 질문 앞에 서곤 합니다.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증언자로 일생을 산 엘리 위젤의 희곡 <샴고로드의 재판>은 17세기의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우리를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그런 일을 방관하셨느냐는 질문 앞에 세웁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힌 채 하나님에 대한 모의재판을 엽니다. 재판을 하려면 원고와 피고, 재판장과 변호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변호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나그네가 등장하여 변호사를 자처하면서 그럴듯한 논리를 동원하지만 그는 사실 사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신이 없는 증거, 혹은 신의 무능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신정론의 문제는 이처럼 언제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안타깝게도 ‘기계 장치로서의 하나님’(Deus ex Machina)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하여 악인들을 처벌하고 선인들을 구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악인들의 독무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며 조급해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더디게만 흐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역사를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투덜거리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동학대 방지 법안 90여 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랍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아직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낭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꿈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꿈입니다.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매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을 품고 광야로 들어갔던 탈출 공동체는 거듭되는 시련과 난관 앞에서 회의에 빠졌습니다. 영롱했던 꿈은 어느새 퇴색되고 고생스러움만 도드라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그리워했습니다. 노예처럼 부림을 받았던 시절, 자기 삶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처럼 안쓰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지향해야 할 목표가 흐릿하면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많은 이들이 순례자로서의 삶을 포기합니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믿음 안에 머물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둠의 영에 속한 이들이 있습니다. 열정적이지만 그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됩니다. 끝없는 성찰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이 때로는 자기를 속이는 허위의식일 수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합니다.

 

옛 선비들은 자기 닦음에 철저했습니다. 대학의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큰 배움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덕들입니다. 선비들은 아홉 가지 바른 생각(九思)과 아홉 가지 바른 몸가짐(九容)을 유지하려고 늘 경계했습니다. 발걸음을 가벼이 하지 않기, 손을 공손하게 맞잡기, 눈을 단정하게 뜨기, 입을 다물고 있기, 말소리를 고요하게 하기, 머리를 곧게 들고 몸을 바르게 하기, 호흡을 가지런하게 하기, 의젓하고 품위 있게 서기, 얼굴빛을 명랑하고 점잖게 유지하기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수련 혹은 수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위의식일 따름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끊음), 더러운 것을 닦아내야 하고(씻음), 지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향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과 존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빛에 속한 사람인지 어둠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관계 속에 하늘의 빛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새해 두 번째 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 위해 더욱 정성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명과 평화의 파종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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