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풀잎의 낮은 연대 2026년 01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풀잎의 낮은 연대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헌팅턴.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이자 예언자’라 일컬어지는 시인 월트 휘트먼의 생가를 찾았다. 기념관은 스산한 겨울 날씨 탓인지 찾는 이마저 없어 쓸쓸했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 160년 전 그가 마주했던 시대의 고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남북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비극 속에서, 그는 어떻게 적과 아군이라는 선명한 분열을 넘어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휘트먼의 시학은 관념이 아닌 처절한 ‘현장’에서 잉태되었다. 전쟁 중 동생의 부상 소식을 접하고 달려간 워싱턴 D.C.의 군 병원은 찢기고 부러진 몸들이 내뿜는 신음으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전시장 같았다. 시인은 그곳에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원봉사자로 머물며 8만여 명의 부상병을 만났다. 그는 단순히 물품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청년들의 차가워진 손을 밤새 잡아주며 고향 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정성껏 대필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의 절망을 기록하는 ‘살아있는 노트’로 정의했다. 고통받는 이들 곁을 지키는 것은 그에게 선택이 아닌 존재론적 의무였으며, 그 헌신적인 시간은 훗날 그의 시 세계의 바탕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그의 시집 <풀잎들>을 다시 펼쳤다. 그는 대표작 ‘나 자신의 노래’에서 “내게 속한 모든 원자는 그대로 당신에게도 속해 있다”고 노래한다. 개별적으로 보이는 풀잎의 뿌리가 땅 아래서 서로 엉켜 있듯, 모든 생명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다. 그렇기에 그는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자는 곧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며, 행해진 말과 행동은 마침내 모두 나에게로 되돌아온다”고 경고한다. 내가 던진 혐오의 언어가 결국 나 자신의 존엄을 훼손하는 부메랑이 된다는 이 일갈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선동이 일상이 된 우리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오늘의 세상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물건은 물론 사람조차 효율과 쓸모에 따라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사소한 차이를 빌미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류의 오랜 꿈인 평화는 아득히 멀어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냉소했다. 강자가 정의를 독점하고 대의를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에서도 변함없이 반복된다. 각자의 확증편향에 갇혀 상대를 괴물로 규정하는 이 차가운 기계적 정의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휘트먼을 다시 호명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고통을 “내가 갈아입는 옷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며, 고통받는 타자와 자신을 일치시킨다. “나는 상처 입은 이에게 그의 아픔을 묻지 않는다. 대신, 내가 그 상처 입은 사람이 된다.” 이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응답이자 적극적인 자기 비움이다. 민주주의는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한 인간의 존엄을 조건 없이 껴안는 ‘몸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 신념이나 진영 논리보다 찢어진 살점과 신음에 먼저 주목했던 시인의 눈길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가르침을 준다.

휘트먼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적군 병사를 응시하며, 그가 남부군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을 듯한 절절한 연민을 기록했다. 시 ‘화해’에서 그는 “나의 적은 죽었다—나와 같은 신적인 인간 하나가 죽었다”고 노래하며 원수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적대감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서로의 얼굴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다.

휘트먼이 찬미했던 ‘풀잎’은 보편적 인류애의 상징이다. 풀은 평온한 들판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도 차별 없이 싹을 틔운다. 죽은 자의 몸을 거름 삼아 다시 피어나는 풀잎처럼,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힘 있는 자의 의기양양한 승전가가 아니라, 쓰러진 자들을 보듬고 낮은 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는 ‘낮은 연대’ 속에서만 비로소 싹트는 법이다.

(* 2026/01/23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에 실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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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26 01-26 12:01)
온통 어두운 소식만 들리고 보여서 제가 태어난 이후 본 세상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가 된 것 같아요. 이전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합의점을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데칼로그>를 보고 책을 사게되었는데 거기에 목사님 추천사가 있는걸 보고 반가웠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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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혜(26 06-14 11:06)
우리 시대의 아픔도 같이 나누고 잊지 않도록 전하고자 하는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도, 같은 내용의 느낌을 가집니다.
가장 최근엔 (26.6월)광주 시립 미술관 전시회의 작품들에서
느꼈읍니다.
우리 모두 보고 읽고 자주 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어주지 못함과 , 전승을 위해 많은 분들의노력함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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