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성급함이라는 원죄 2021년 08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성급함이라는 원죄

‘미라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구출해낸 작전명이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이 아니라 연약한 존재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책임감이 일으킨 기적이다. 영유아를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시민 391명이 한국에 들어왔다. 정부는 군 수송기를 보내 그들을 안전하게 모셔왔다. 주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바그람 한국병원,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과 가족들이 마침내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앞으로 그들이 감내해야 할 생의 무게가 만만치 않겠지만, 그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들은 당분간 충북 진천의 국가 공무원 인재개발원에 머물 예정이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세상에는 일상을 기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전격 철수를 결정하면서 국제 사회가 요동하고 있다. 혼란과 공포가 마치 어둠처럼 그 땅을 뒤덮고 있고, 부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난민들의 수용 문제를 두고 인접국들이 긴장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언제든 해야 할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런 철군이 불러일으킬 혼돈과 뒷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공포는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비정한 것이 국제관계라지만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으깨지는 개체로서의 존재를 존중하지 않는 정책은 유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는 인간에게 두 가지 원죄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죄들은 그 원죄로부터 파생된다. 성급함과 태만함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성급함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성급함이 시간을 앞당기려는 욕망이라면 태만함은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기독교 전통은 태만이 일곱 가지 죄의 뿌리 중 하나라고 말한다. 태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한없이 미뤄두는 태도이다. 그런데 카프카는 어쩌면 원죄가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급함이다. 성급함이야말로 모든 죄의 뿌리라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우리는 성급하게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정죄하고 혐오한다. 성경은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라”고 말한다. 더디 하기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상황을 살피려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로렌스 수사가 달여 만든 약을 먹고 마흔 두 시간 동안 가사상태에 빠진 줄리엣이 죽은 줄 안 로미오는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수많은 비극이 성급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성급한 사람은 기다릴 줄 모른다. 마음에 한번 후림불이 당겨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버르적거린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시간을 지속이 아니라 파편으로 경험한다. 정보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면서 조바심, 부산스러움, 불안이 우리의 기본 정서가 되고 말았다. 배설하듯 쏟아내는 성급한 말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감성을 해치고, 성급한 판단과 행동은 다른 이들이 다가설 여백을 제거한다.

시인들은 흘러가는 인생의 한 때를 언어의 올가미로 잡아채 영원성을 불어넣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지만 그것을 온축하여 지적 체계를 만들거나 품성으로 가꾸지 못한다. 무르익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삶이 속도전이 되면서 이드거니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 정보는 명멸할 뿐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우리 시대는 그런 의미에서 궁핍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재독학자인 한병철 교수는 <시간의 향기>에서 우리 시대를 가리켜 역사 혹은 이야기가 정보에 밀려난 시대라고 말한다. “정보들은 서사적 길이나 폭을 알지 못한다.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 정보에서 정보로 건너뛰는 동안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삶은 진동한동 분주할 뿐 향기를 품지 못한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본 히브리의 한 지혜자는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라고 말했다. 성급함이라는 원죄에서만 벗어나도 삶의 무게와 비애는 줄어든다. 피난처를 찾아 우리에게 다가온 이들을 따뜻하게 그느르는 것이야말로 어엿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

(2021/08/28 자 경향신문 컬럼입니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