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4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곳간을 헐어야 할 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b-24). 

영혼의 독백
부자 되기 싫은 사람이 있을까? 부자는 선망의 대상이거나 질시의 대상이다. 돈은 사람에게 유사 전능함을 안겨준다. 돈으로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그 금단의 열매를 먹는 순간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로 여자를 유혹했다. 모든 달콤한 유혹 속에는 네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이 메아리치고 있다. ‘신처럼 된다는 것’은 오늘날 암암리에 무한한 자유를 행사하고, 자기 뜻을 다른 이에게 언제라도 부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돈은 변형된 신이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아닌 돈이 중심인 체제이다. 그 체제는 사람들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된다. 

소비사회의 개인은 남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동시에 남과 구별되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욕망 속에서 바장인다. 욕망은 타자를 통해 매개되는 것이기에, 타자에게 눈길을 주며 사는 순간 우리는 확고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신민으로 편입되고 만다. 그 속에서는 누구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기독교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그저 불편한 말씀일 뿐, 그 말씀 때문에 부를 내려놓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날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거절하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하고 말씀하신 후에 비유 하나를 들려주었다. 한 부자가 있었다. 풍년이 들어 그의 밭에서 난 소출이 풍성했다. 여문 이삭에 깃든 황금빛 광채가 사뭇 뿌듯했을 것이다.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곡식을 쌓아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스스로 흐뭇해진 그는 자기 영혼을 위무하듯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렇게 자기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자기 생명의 유한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이 질문은 가혹하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편 제3권의 서론 격인 시편 73편의 시인은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 때문에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도 없고, 많이 이들을 덮치는 재앙도 그를 피해 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가련한 이웃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의롭게 사는 이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는데 비해 그는 오히려 평안하고 재물 또한 늘어난다. 하지만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을 깨닫는다. 마치 제삿날을 위해 준비된 제물처럼 그들은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악인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는 고지식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어리석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가? 그는 자기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은 그에게 아직도 먼 미래에 닥쳐올 불확실한 현실일 뿐이다. 그는 마틴 하이데거가 말하듯 다른 이들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은 있겠지만 자기의 죽음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숙고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죽음과 죄책, 질병과 유한함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은 우리 삶을 재정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 벼랑 끝 경험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초월적 비약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지금 행복한 사람은 죽음이라는 불쾌하고도 확실한 현실과 가급적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불안의 대용물
곳간에 켜켜이 쌓이는 곡식은 불안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과 맞설 치명적 무기이다. 그렇기에 그는 흐뭇해한다. 문제는 그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아닌 존재자들 위에 자기 삶의 집을 지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부유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난하다. 결핍의 공포가 그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104편은 피조물들을 보살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은 물론이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짐승, 그리고 가축의 먹을거리를 장만해 주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골짜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짐승들이 해갈하도록 하시고, 땅에 먹을 것이 나게 하시어 동물들이 살게 해주시고, 바다의 물고기들에게도 먹을 것을 공급하신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7-29). 아름답기는 하지만 현실 정합성은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재화를 독점하려는 이들로 인해 물질은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고 특정한 곳에 쌓이고 있다.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불안이 저절로 내면화된다. 저명한 구약성서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이런 현실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불안의 기초가 되는 결핍은 창조의 풍성한 은혜에 격렬히 저항하며, 결과적으로 감사를 잃고, 착취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시편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불안에 사로잡혀 반(反)이웃 사랑의 결과 결핍을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베풂의 이웃 사랑은 창조의 풍성한 결실을 통해 관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1)

내면화된 불안은 나눔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축적만이 살 길이라는 오도된 감각이 사람들을 확고히 사로잡기 때문이다. 결핍감이 깊어갈수록 창조주가 풍성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잊혀진다. 따라서 나눔을 통한 행복도 맛보기 어렵다.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쌓아두어야 한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그 어리석은 부자는 가만히 보면 우리들 모두의 초상이다. 주식회사 풀무원의 설립자이자 정치가인 원혜영은 아버지 원경선의 삶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는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의 경제원칙이라고 했다. 잉여생산이 생기면 그것을 일용할 양식이 없는 생명에게 나눠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탓에 그 원칙이 깨졌다는 게 아버지 생각이다. 쌓아놓기 시작하자 곳간이 필요했고 곳간을 짓자 도둑이 생겼으며 도둑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힘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군대가 필요했고 그 군대가 전쟁을 불러 왔다는 것이 아버지의 전쟁 기원론이다. 그 뿌리는 결국 가족 이기주의라고 했다.”2)

부유함이라는 덫
곳간을 짓는 것은 잉여분을 필요한 이들과 나누지 못하는 정신적 무능함의 결과이다. 곳간에 잉여분이 쌓이는 순간 다른 한편에서는 결핍에 시달리는 이들이 발생하게 마련이고,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도둑이 된다. 도둑으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고, 군대는 결국 전쟁을 불러온다. 소박하지만 통찰력 있는 분석이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의 경제원칙인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은 끊임없이 그건 불가능한 꿈이라고 속삭인다.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의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잉여분을 쌓아두기 위해 곳간을 짓는 사람을 일러 어리석다 한다.

니사의 주교였던 대 바실리우스(330경-379)는 카파도키아의 수도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난 신심 깊은 로마 상류층 출신의 사람이다. 그는 비유 속에 등장하는 그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많이 가져서 비참해졌고, 재산 때문에 불쌍해졌고, 여전히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더 비참하고 불쌍해졌습니다.”3) 부유함이 그에게 자유를 선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와 근심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부자의 어리석음은 그 밭의 소출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그것을 맡기신 분이 누구신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 치명적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큰 강물이 많은 수로를 통해 비옥한 땅으로 흘러들어 가듯이, 그대의 재산도 많은 길을 통해 가난에 찌든 이들의 집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십시오. 우물물을 다 퍼내면, 우물에서는 깨끗한 물이 더 많이 솟아 나옵니다. 그러나 물을 다 퍼내지 않으면, 우물은 막혀 버려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쓰지 않는 재산은 아무한테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사용하고 순환시키면, 재산은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4)

바실리우스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차라리 곳간을 헐라고 말한다. 그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손으로 이 불의한 구조물을 헐어 버리십시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 곳간을 파괴시켜 버리십시오. 탐욕의 모든 창고를 헐어 버리고, 지붕을 허물어뜨리고, 담벼락을 헐어 버리고, 썩어 가는 곡식을 햇빛에 내놓고, 감옥에 갇혀 있던 재물을 끄집어내고, 탐욕스런 신의 음침한 창고를 때려 부수십시오.” 그리고 정히 “곳간을 갖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이 배 속에 곳간을“ 지으라고 말한다.5)

우리는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대토지 소유자였던 그 집안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것은 17세기 사람 최국선 때부터였다고 한다. 1671년 삼남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의 최부자 최국선의 집 마당에는 큰 솥이 내걸렸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는 것이 주인의 명이었다. 큰 솥에는 매일 죽이 끓었고, 원근 각처에서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이들이 그 집에 몰려들었다. 흉년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때에도 그 집을 찾은 이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 최 부잣집에 전해 내려오는 제가(齊家)의 가르침인 ‘육훈(六訓)’은 매우 인상적이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말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시집 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 집안이 재물을 그렇게 사용하면서도 어떻게 부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일은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비판할 요소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찬 받아 마땅하다. 곳간을 짓는 대신 헐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닌가?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이들이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보면서, 애당초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번 것은 기술이나 정보에 대한 독점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비판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차츰 바꿔나가야 한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부함이 늘 나눔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들의 자선 행위는 소중하다. 

궁핍한 시대
성경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잠시 그 땅에 머물다 떠날 뿐이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땅에서 나는 것들을 당신의 피조물들이 골고루 나누며 살기를 원하신다. 독점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공(公)의 사유화’가 바로 죄라고 말한다. 에덴동산 한복판에 있던 선악과는 모두에게 속한 것이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사유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인 개럿 하딘을 이것을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하자원, 하늘,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고기, 바다 등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을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당 세대에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된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6) 지금 급격히 사막화 되고 있는 몽골의 초원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사막화는 물론 세계 기후 변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유목민들이 고가의 캐시미어를 만들 수 있는 털을 얻기 위해 염소를 과다 사육한 것도 사막화 확산을 가져온 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당장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자연을 황폐화하고 나면 머지않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문명화의 과정은 자연을 닦달하는 것 행위와 별반 구별되지 않는다.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자기 시대를 가리켜 ‘궁핍한 시대’라 했다. 물질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 속에 깃든 광휘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소멸되어 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물은 그 신비한 빛을 잃고 인간의 욕망을 위해 동원되는 자원이 되고 말았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궁핍하다. 풍요 속의 빈곤이 적나라한 우리 현실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은 이들이 ‘문제는 경제’라며 무분별한 개발을 허용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택지를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숲과 땅을 파헤쳤다. 수 천년, 수 만년 동안 자연이 형성해온 질서가 무너지면서 땅은 몸살을 앓고 있다. 물의 흐름이 막히자 수해도 잦아졌다. 수해를 방지하고 수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바닥을 파고 물의 흐름을 바꿔놓자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발생했다. 물은 흐르지 못해 탁해졌고, 해마다 녹조가 발생했다. 녹색으로 변한 강을 볼 때마다 끔찍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런 느낌은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 인해 피로 변한 강물을 보아야 했던 애굽인들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염된 물에 사는 큰빛이끼벌레, 실지렁이, 붉은 깔따구 따위가 증식하면서 생태 환경은 몰라볼 정도로 나빠졌다. 신처럼 되고픈 인간의 욕망이 빚은 참극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개발 사업이 벌어지는 지역의 땅이나 산 가운데 많은 부분이 미리 정보를 획득한 이들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사람들은 개발은 명분일 뿐이고, 진짜 관심은 권력자들의 재산 증식이 아닌가 의심한다. 한 사회의 토대인 신뢰는 그렇게 서서히 무너져간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곳간을 짓는다. 차명 계좌를 만들기도 하고, 고가 미술품에 투자하기도 하고,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기도 한다. 그들도 ‘영혼아 여러 해 쓸 돈을 숨겨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할까? 그렇다면 이 두려운 경고에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히브리의 한 시인도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한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10-12)

기아라는 추문
바로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 두려운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파멸은 도둑처럼 닥쳐온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한 스위스 출신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Jean Ziegler, 1934- )는 남의 아픔과 배고픔에는 아랑곳없이 더 큰 곳간을 짓는 일에 열중인 세계의 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영양 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이는 그 어떤 이유나 정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다. 나아가 이는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에 해당한다.…… 기아를 방지하기 위한 투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뒷걸음질치고 있다. 2001년엔 7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8억 2,6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었다. 그 숫자는 현재 8억 5,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005년에서 2004년 사이에 만성적인 영양 결핍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2,800만 명 증가했다.”7)

이 책이 나온 게 2005년이니 지금의 현실은 더 가혹해졌을 것이다. 풍요의 시대에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인간의 추문이 또 있을까. 기아는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다.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경작지가 줄어들고, 갚아야 할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삶이 황폐하게 변한다. 극심한 기근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장 지글러는 “기아는 신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 정신적 신체적 기능 약화, 미래에 대한 불안, 경제적인 독립성의 상실 등을 동반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기아로 죽는 사람은 누구든 살해당한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8)

부자의 곳간에는 여전히 먹을 것이 쌓여있고 심지어 썩어나가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잠을 청한다. 지금 우리의 창고에 넘치고 있는 물건들은 어쩌면 다른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인지도 모른다. 문간에 굶어 죽어가는 이가 있는데도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벌었다고 하여 그 추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화의 독점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자기 충족을 위한 파괴적 충동을 가리켜 ‘악’이라 말한다. 그는 ‘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 악은 ‘지속적인 혼돈의 세력을 떠받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혼돈을 추구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것 즉 돈, 권력, 무기, 성 그리고 영향력을 축적하려고 한다. 
 · 악은 ‘신뢰할 만한 풍성한 떡이 공급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이웃을 희생해서라도 떡을 ‘독점’하려 한다.
 · 악은 ‘루아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교만히 행한다.”9)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는 명시적인 악인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유능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땅을 잘 관리하고, 하인들을 잘 부리고, 자연재해에 대비를 잘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모든 방법을 익힌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성서의 관점으로 보면 ‘악인’이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에 베푸시는 은총의 풍성함에 의지하기보다 자기 재산에 의지한다. 그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불퉁거렸던 가인의 동류이다. 

인간은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참 사람이 된다.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따라서 참된 자기로부터의 도피인 동시에 하나님께 등을 돌림이다. 하나님을 등진 이들의 내면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이 질문 앞에 진지하게 설 때 그는 욕망이 중력으로부터 조금쯤 벗어나 영혼을 고양시키는 은총 앞에 서게 된다. 필요한 이들에게 주기 위해 내 곳간을 헐 때, 그 음습한 욕망의 자리에 하늘의 빛이 가득 찰 것이다. 반면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곳간을 더 크게 지으려 할 때 애굽 땅을 덮었던 그 불길한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주)
1. 월터 브루그만, <시편적 인간>, 박형국·김상윤 공역, 한국장로교출판사, 2017년 8월 25일, p.138-139
2. 원혜영, ‘원경선-복음을 유기농으로 일군 큰 농부’,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다룬 책 <춤추며 사랑하라>[가제] 중에서
3. 대 바실리우스, <내 곳간들을 헐어 내리라 외>, 노성기 역주, 분도출판사, 2018년 1월 25일, p.18
4. 앞의 책, p.28-29
5. 앞의 책, p.31-32
6. Wikipedia 참고
7.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09년 11월 25일, p.115
8. 앞의 책, p.116
9. 월터 브루그만, 앞의 책,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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