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8 2017년 02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8


잘들 지내셨는지요? 

올해는 3월의 첫날이 공교롭게도 성회 수요일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절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저는 사순절을 순례의 절기로 생각합니다. 사실 순례라는 말은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해외여행을 성지순례로 즐겨 포장합니다. 여행사가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만든 코스를 마치 점을 찍듯 분주히 옮겨다니는 여정을 순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텔레비전을 통해 티벳의 라싸를 향해 오체투지로 나아가는 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강요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은 오직 거기에 자기 인생의 의미 전체가 걸린 것처럼 진지하기만 했습니다.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 폈다 반복하며 나아가는 그들을 보고 누가 감히 어리석다 하겠습니까?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인간성의 심연을 얼핏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합리성과 효율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순례자들의 열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당도하고 싶었던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특별한 장소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는 자기들 나름의 성지를 향해 순례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룸비니나 보드가야를 보고 싶어합니다. 힌두교도들은 바라나시를 향해 나아갑니다. 무슬림들은 메카에 가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 하더군요.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순례지로 삼아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요즘은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순례의 전통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헬레나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 예루살렘 순례는 신실한 신자들 특히 수도자들의 꿈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의 성지순례가 활성화된 것은 대략 11세기 무렵부터로 보입니다. 파리 근교의 클루니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회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평신도들에게 예수와 성인들과 관련된 땅으로 순례여행을 떠나도록 격려했습니다. 여건상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사도들이 묻힌 것으로 믿어지는 곳으로의 순례는 대단히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로마, 아리마대 요셉이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글래스톤베리, 야고보가 묻힌 곳으로 믿어지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여행 중에 순례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배울 수 있었고, 한시적이긴 하지만 세속적인 삶을 뒤로 하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그들은 독신자처럼 지냈고, 다른 순례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싸우거나 무장을 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순례자들은 평안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길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의 복장이나 가방은 단출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는 오래 걸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잃어버린 단순함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을 걷고 또 걷노라면 발이 절로 무거워질 것이고, 몸이 고단하면 말수도 점차 줄어들 것이고, 말이 스러짐과 동시에 이런저런 사념도 사라질 것입니다. 사회에서 분주하게 사는 동안 우리에게 요구되었던 역할의 부담에서 해방될 때, 아마도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직함과 가면과 역할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 그 자체로만 세상과 만나는 사람이 바로 순례자입니다. 순례는 잃어버렸던 진정한 자기(Self)를 찾아가는 고단한 과정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림이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간결한 말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고백록>, 최민순 옮김, 제8권 제5장, 성바오로출판사, p.201).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악의 버릇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쳐 보았지만 몸에 익지 않는 선보다 버릇이 된 악이 오히려 더 셌다고 말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사귀어오던 옛날의 헛된 일, 어리석은 일들이 내 육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소곤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릴 버리고 갈텐가?' 또 '이제부터 그대와 있기는 영원히 그만이란 말이지?' '이제부턴 이것도 저것도 영영 그대에겐 당치 않단 말인가?'"(위의 책, 제8권 11장, p.216)


옛 삶의 인력이 중심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잡아채곤 합니다. '우릴 버리고 갈텐가?' 옛 삶은 그렇게 집요합니다. 인생을 순례길로 이해하는 사람은 익숙한 것들과 자꾸 작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그런 길로 부릅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예수의 마음과 접촉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예상되는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셨습니다. 예루살렘행을 영광의 길로 이해한 제자들은 들뜬 기분이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싸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인 싸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성전 체제,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또한 배제함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종교인들의 위선과의 싸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구체적인 아픔을 외면하면서 '천상의 독백'만 거듭하는 종교인들은, 강자들의 이익에 복무하게 마련입니다. 말로는 선민이라 자부하지만 그들은 로마 체제에 부역하는 부역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작년 초겨울, 대림절기에 우리 교회는 세월호 유가족들로 구성된 4.16합창단을 예배에 초대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 새벽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분들은 세월호의 진상이 규명되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수습자 9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온 몸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담한 절망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그분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깊이를 우리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망의 자리에 그저 주질러 앉아 있기를 거부했습니다. 절망을 빚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준 첫번째 노래는 '약속해'(윤민석 작사, 작곡)라는 곡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가 모두 엄마 아빠다

너희가 우리 아들이다/너희가 우리의 딸이다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너희 모두가 아들 딸이다

그 누가 덮으려 하는가 4.16 그날의 진실을

그 누가 막으려 하는가 애끓는 분노의 외침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리 모두 행동할 거야

이마저 또 침묵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

끝까지 다 밝혀낼 거야 끝까지 다 처벌할 거야

세상을 바꾸어 낼 거야 약속해 반드시 약속해"


여자 파트가 낮은 음성으로 부르는 첫번째 소절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그리고 남자 파트가 이어 부르는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라는 소절이 끝나자 회중석에서 풀썩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값싼 감상이 아니라 담담하게 부르는 저들의 노래가 사람들 속에 있던 슬픔과 죄책을 건드렸던 것이겠지요. 이후에 이어지는 가사가 불편하게 들릴 분들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견뎌온 이들의 노래는 사람들을 보편적인 슬픔의 공간으로 이끌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단원 가운데 한 분이 앞으로 나와 흔들리는 목소리로 교인들에게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8반 00이 아빠입니다. 여기 계신 많은 성도님들 앞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함께 해주신 00교회에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저희를 돌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썩어가는 한국교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주셔서. 2014년 4월 16일, 그 날 이후에 저희 가족들은 알았습니다. 그 날, 그 현장에 국가와 정부는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기까지는 900일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이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 같이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늘 함께 해주시는 00교회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요. 저희가 늘 다짐하며, 약속하는 것은 부모로서 끝까지 진실을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 동행해 주십시오."


나중에 많은 교인들이 '고맙습니다'라는 말 앞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고 고백하더군요. 그분들 곁에 머문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자각과 죄스러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그분들이 감내해 온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박두진 시인의 '갈보리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배신과 재판,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추체험하고 있습니다. 홀로 죽음과 직면해야 했던 저 캄캄한 시간을 상상하며 시인은 절절한 심정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뜨물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 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장엄한 것입니다. 무고하게 겪는 모욕과 천대, 박해의 쓰라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강력한 도전입니다. 4.16합창단이 부른 두번째 노래는 '인간의 노래'(야마노키 다케시 곡)였습니다. 1987년 4월, 일본 국철을 분할 민영화하려는 계획이 기획되고 집행되자 국철 노조원 200여명이 자살로 그 사태에 항거했다고 합니다. 야마노키 다케시는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는 염원을 담아 이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 노래가 바로 자신들의 노래임을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상처 안고 사는 지친 어깨에 작은 눈길 건네는 친구는 있는가/고통 속에 누워 서러웁게 식어가는 차가운 손 잡아줄 동지는 있는가/희망의 날개 아래 어둔 슬픔 가두고 잊혀진 우리들의 기쁨을 노래하리/나는 부르리,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합창이 울려퍼지는 동안 회중들은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후렴 부분인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나는 부르리 인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를 반복할 때 제 가슴에도 절절한 뜨거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요. 살아야 하지요. 끝끝내 살아서 인간의 노래를 불러야지요. 저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구차한 우리의 생존이 역사 이후에도 이어지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 육체의 생명이 다한 후에도 하나님 안에서 우뚝 일어난다는 것이 아닌가요?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이들은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저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8:32)이라는 말씀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문회나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숨겨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게 보이던가요?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이들의 그런 태도를 보면서 비애감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학식과 지위도 그들을 당당한 주체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어로 '진리'를 가리키는 단어는 '아레테이아'입니다. 이 단어 속에는 망각을 뜻하는 단어 '레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리란 그러니까 망각을 깨뜨리는 것, 그래서 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둠이기에 빛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비치는 순간 어둠은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진실을 이길 거짓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만이 진실을 굳게 견지할 수 있습니다. 이 계절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평균적 신앙인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굳게 붙드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고난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름길을 거뜬히 걸어갈 수 있을만큼 든든한 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순례자의 본분을 잊지 않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중심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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